#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이재훈(45)씨는 요즘 돈 생각만 하면 입맛이 없다. 월급이 들어와도 아파트 대출금을 갚고 나면 30%가 사라진다. 지난해에는 둘째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원비와 생활비도 부쩍 늘었다. 매달 저축하는 돈은 개인연금과 펀드를 포함해 70만원 정도. 경조사 지출이 많은 달에는 통장 잔액이 바닥나기 일쑤다.
이씨는 “앞으로 돈 벌 수 있는 기간이 길어야 10년 남짓인데 애들 대학 등록금, 결혼자금, 노후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다”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 짜증을 낸다”고 말했다.
# 2년 전 결혼한 이주연(34)씨는 남편 월급날만 되면 부부싸움을 한다.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기 무섭게 전세 대출 이자에 카드 값, 공과금 등이 자동 이체되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씨 부부는 자녀가 없어 생활비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고 매월 적금과 펀드에 150만원씩 집어넣을 만큼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돈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이씨는 “결혼 전에 서로 모아 뒀던 돈도 벌써 다 썼다”며 “앞으로 아이도 낳아야 하고 집도 사야 하는데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 후 가족 모임이나 경조사가 늘면서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길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토로했다.
돈 걱정 증후군은 영국의 정신병리학자 로저 헨더슨이 2006년 발표한 ‘돈의 의미’라는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빈부와 상관없이 돈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거나 신경질·소화불량·설사·메스꺼움·식욕부진·조울증 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돈에 너무 집착하거나 예민해질 때 나타나는 증세다.
헨더슨은 2005년부터 1년 동안 프랑스 보험회사인 악사(AXA)와 함께 돈 걱정 증후군을 식별하는 증상지표를 만들었다.
악사 직원을 상대로 재무 스트레스를 조사한 결과 전체 직원의 63%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돈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1년 안에 돈 스트레스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23%는 돈 걱정으로 인간관계가 악화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헨더슨은 이런 조사를 토대로 “빚이 많고 적음 또는 소득 수준에 따라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경제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돈 걱정 증후군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따르면 30~50대 중산층(월소득 187만~563만원) 1128명과 고소득층(월소득 563만원 이상) 2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산층과 고소득층도 자신이 속한 계층보다 본인이 더 낮은 계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소득층의 49.1%는 자기가 빈곤층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소속감이 매우 낮은 셈이다.
돈 걱정 증후군은 특정 국가나 지역의 문제도 아니다. 지난해 11월 시장 조사업체인 GFK가 22개국에서 15세 이상 남녀 2만7000명을 상대로 ‘최대 스트레스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29%는 ‘돈이 부족한 것’이라고 답했다. 다음으로 ▶스스로 주는 강박(27%) ▶수면 부족(23%) ▶시간이 부족해 원하는 일을 못하는 것(22%) ▶업무량 과다(19%)순이었다.
국내에도 돈 걱정 증후군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최성진 부산메리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는 “최근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불안감과 스트레스, 가정불화 등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2015년 3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가계소득 증가율은 금융위기 이후 6년 만에 가장 낮았다. 전년 동기 대비 0.7%포인트 늘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소득증가율이 사실상 제로인 셈이다.
경제적 행복감도 뚝뚝 떨어진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경제적 행복지수’는 40.4점이다. 2014년 하반기보다 4.1점 떨어졌다. 2012년 하반기(40.4점)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경제적 행복지수는 소득 안정성, 상대적 경제 상황, 생활 수준의 향상 가능성, 경제적 평등도, 경제적 불안 5개 항목과 전반적인 경제적 행복감을 물어 지수화한 것이다. 최근 조사에서 5개 항목 중 경제적 불안(29점)은 경제적 평등에 이어 둘째로 수치가 낮았다.
서경현(삼육대 교수) 한국건강심리학회장은 “금융 스트레스는 충분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걱정에서 시작된다”며 “나이가 들수록 노후 준비 부족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 사회의 사회심리적 불안의 원인 분석과 대응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불안요소에는 경제적 문제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8월부터 한 달여간 19세 이상 성인 7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조사 대상자의 25.3%는 최근 1년 동안 노후 준비에 대해 가장 불안감을 느꼈다. ‘취업 및 소득 문제’가 18.4%로 뒤를 이었다. 국내 성인의 절반 가까운 43.7%가 경제 문제를 불안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 중 50대가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컸다.
이윤학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장은 “중산층과 고소득층이라고 해도 이들의 공통된 최대 고민은 노후 준비”라며 “돈과 관련된 미래는 현재 재무 상황과 상관없이 얼마큼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지난 수년간 임금이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에 머물면서 자신의 재정 상태에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돈 걱정 증후군은 의학적 질병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리적·신체적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본지는 헨더슨의 연구보고서와 한국건강심리학회장의 자문을 토대로 ‘돈 걱정 증후군 자가진단표’를 만들었다. 10개의 항목 중 ‘예’가 3개 이하면 양호, 5개 이상이면 의심, 7개 이상이면 전문가 상담을 받아 보는 것이 좋다.
[S Box] ‘멈춰, 괜찮아’ 돈 생각 중지 훈련을 하라
돈 걱정 증후군 자가진단에서 ‘예’가 5개 이상 나왔다면 자신의 재무 심리 상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돈 걱정 증후군이 의심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재무 상황을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과거와 비교할 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성진 부산메리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는 “현재 나의 재무 상태를 비관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이라며 “돈에 대한 우울과 불안이 돈 걱정 증후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당장 자신이 생각하는 큰돈이 생기지 않는 이상 돈 걱정을 해결할 수 없다”며 “계속 궁핍하다는 생각이 심리적 빈곤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돈 걱정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최성진 박사는 “생각 중지 훈련을 하라”고 조언했다. 돈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생각을 멈추라는 것이다. 그는 “장시간 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머릿속으로 ‘멈춰, 괜찮아’ 하는 식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좋다”며 “우울증 환자가 심신 치료를 받을 때도 생각 중지 훈련을 한다”고 말했다. 생각 중지 훈련은 짧은 시간에 대뇌에 휴식을 주는 훈련법으로 휴식 능력을 되찾게 한다.
곽금주 교수는 “물질적인 빈곤이 심리적인 빈곤보다 중요해지면 불안감이 더 커진다”며 “지금 갖고 있는 생활비 안에서 소비예산을 짜고 작은 돈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증후군을 이겨 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김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