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준비+기회
퇴직후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 본문
퇴직후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24년 5월 19일 23시 15분
퇴직 후 나의 일상은 지극히 한가로웠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등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평온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늦은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받자마자 친정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아빠가….” 당황하셨는지 말을 잇지 못하셨다. 들어보니 당장 아버지를 응급실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119에 전화를 걸어 필요한 조치를 하고는 나도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셨다. 어려운 시절에 가정을 꾸리셔서 가족을 위해 험한 일들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응급실에서 마주했을 당시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의 부재는 꿈에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병간호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입·퇴원을 반복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손과 발이 돼드려야 했다. 처음 해보는 간병 일은 너무도 어려웠다. 때맞춰 약을 챙겨드리는 일부터 티슈로 얼굴을 닦아드리는 일까지 모조리 서툴렀다. 한번은 기저귀를 제때 갈아드리지 못해 아버지 피부에 습진이 생긴 적도 있다. 한 움큼 약에 또 하나의 약이 더해지니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지치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소중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전학 후 적응 못 하던 나를 다독여 주셨던 기억, 대학입시에 낙방했을 때 용기를 주셨던 기억 등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 같이한 특별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대부분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힘을 주셨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나빠졌다. 쇠잔해지시는 아버지를 뵈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돌아본 나의 주변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부모님이 그랬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사이 부모님은 무척이나 나약한 상태로 변해 계셨다. 한결같이 모진 풍파를 막아주셨던 지난날 모습은 더는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돌봄이 절실한 힘없는 존재가 되어 계셨다.
만약 내가 퇴직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친정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가신 첫날 가보지도 못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병간호를 부탁하며 가끔씩 병세만 체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자라 드문드문 통화에서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을 진짜로 믿고 업무에만 몰두하지 않았을까. 그 생각만 하면 비록 퇴직 후 내 삶이 뒤죽박죽되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내게 도움을 청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주도적으로 사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셨다.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혼자서는 버틸 수 없게 되자 비로소 타인의 손길을 받아들이신 거다. 그렇게 두 때(時)가 맞았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누군가를 찾으셨던 아버지의 때, 그리고 퇴직 후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나의 때. 일생에 단 한 번, 아버지가 다른 이를 필요로 하셨던 시기에 마침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졸업한 이후 나의 근황을 물으셨던 적이 없었다. 나 스스로 결정한 뒤 말씀드리면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입사도 결혼도 그랬다. 그런데 병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여러 번 내게 질문하셨다.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하시느냐는 내 말에는 짧게 화답하셨다. “자식인데….” 그게 아버지의 사랑법이었다. 묵묵히 자식을 지켜봐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하마터면 모를 뻔했다.
결국,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다. 바람이 유독 시원했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가족의 소중함, 참된 사랑의 의미 그리고 삶의 유한함까지, 그와 더불어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퇴직 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제껏 정신없이 지내왔고 아직도 새로운 일만 좇는 내가 꼭 한번은 넘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회사를 떠난 후 맞이한 예상치 못한 변화 속에서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대다수 퇴직자의 많은 문제는 돈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돈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대단히 많다. 부모, 자식, 건강 등이 그렇다. 비록 퇴직은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대신에 더욱 귀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부모님과의 마지막 시간, 퇴직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퇴직후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동아일보 (donga.com)
'성공을 향한 초보자 필독 > 전문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은 일하고 밥을 먹는 존재다 (4) | 2024.05.22 |
---|---|
"돈 내고 조식 먹겠냐" 코웃음 쳤는데…관심 폭발한 아파트 (0) | 2024.05.22 |
토지경계 분쟁, 지적재조사가 답이다 (2) | 2024.04.03 |
신문 읽는 사람이 가짜뉴스 더 잘 알아챈다 (0) | 2024.03.27 |
주택시장, ‘거인의 어깨’에서 살펴야 (0) | 2024.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