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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준비+기회

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본문

성공을 향한 초보자 필독/전문가 칼럼

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네잎클로버♡행운 2024. 1. 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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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박훈 서울대 교수가 말하는 ‘日자본주의 아버지’ 시부사와

방현철 기자 / 입력 2024.01.23. 03:00업데이트 2024.01.23. 19:13

박훈 서울대 교수는 지난 12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근대에 대규모 공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은행을 세워 경제에 혈액인 돈을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일본 1만엔권 얼굴이 오는 7월 3일부터 바뀐다.

1984년부터 20년간 1만엔의 얼굴이었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를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가 대신한다.

기업인이 일본 지폐에 나오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시부사와의 초상이 들어간 지폐는 122년 전 대한제국 시절 한반도에서 먼저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자체 지폐를 만드는 데 실패한 사이 시부사와가 은행장으로 있던 제일국립은행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금융 시장을 장악하려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뿌렸던 것이다.

일본 근대사를 연구하는 박훈 서울대 교수를 지난 12일 만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봤다.

 

◇시부사와의 한반도 진출

 

-국내 화폐에 왜 시부사와가 등장했나.

“대한제국에서 1902년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이 늘어나자 지폐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왔다.

개항장에선 일본 은화가 주로 쓰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신용이 없으니 지폐를 만든다고 해도 유통이 안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자 시부사와가 주도하던 제일국립은행이 일본 대장성의 승인만 받고선 대한제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지폐를 낸 것이다.

일본 돈으로 교환 가능한 1엔, 5엔, 10엔 지폐를 발행했는데, 당시 제일국립은행장인 시부사와 초상이 들어갔다.”

 

-시부사와가 주도한 제일국립은행은 어떤 곳인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세워진 메이지 정부는 처음에 미국 정부의 인가를 받고 영업하던 ‘내셔널 뱅크(national bank)’를 은행의 모델로 삼았다.

국가가 인가하는 은행이 각자 지폐를 발행하는 방식이다.

통상 국립은행으로 번역하지만, 국가가 세운 은행은 아니고 민간이 국가의 허가를 받아 세웠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이런 국립은행이 일본에서 150~160개 세워졌는데, 제일은 가장 먼저 허가를 받았다는 뜻이다.

시부사와를 중심으로 1873년 제일국립은행이 설립됐고, 그는 1875년 첫 행장이 돼서 1916년까지 40년가량 이 은행을 이끈다.

한편 각 은행이 내던 지폐는 1882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만 발행하도록 바뀐다.

제일국립은행은 민간 은행의 리더로 경제와 기업에 신용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제일은행권 10엔에 시부사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제일국립은행은 조선에서 뭘 했나.

“제일국립은행은 우선 1878년 부산에 지점을 낸다.

그리고 대한제국 요청으로 정부 관세 업무를 도와준다.

정부의 관세 공금을 외국은행이 관리하는 게 지금은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 중국에서도 있던 일이다.

영국인이 세운 HSBC은행이 중국과 태국의 관세 공금을 관리했다.

청나라 리훙장이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도 처음엔 관세 업무를 하러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엔 근대적인 재정 관료도 없고 은행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일국립은행 지폐에 대한 반대는 없었나.

“상인들은 제일은행권이 합법적인 지폐가 아니라면서 거부하는 운동을 벌였다.

대한제국은 처음엔 눈감고 있다가, 상인들의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1902년 말 훈령을 내려 제일은행권 통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제일은행권이 일본 돈과 같은 것인데 금지해선 안 된다고 압박했다.

결국 1903년 7월 대한제국은 제일은행권의 자유로운 통용을 허용하게 됐다.”

 

-대한제국은 왜 자체 지폐를 못 냈나.

“1903년 대한제국은 ‘중앙은행 조례’를 만들고 중앙은행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탁상공론에 그쳤다. 일

본의 방해도 심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한반도에서 일본의 입김이 강해졌다.

제일은행권은 금본위제였던 일본 돈으로 바꿀 수 있어 가치가 안정돼 있었기 때문에 유통량이 늘어났다.

또 대한제국의 백동화와 엽전을 제일은행권으로 바꾸게 하는 화폐 정리 사업도 진행했다.

일본의 민간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이 대한제국에서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상인들이 큰 피해를 봤다.

다만 일본이 1909년 한국은행이란 이름의 중앙은행을 만들면서 철수한다.

이 한국은행은 현재 한국은행과는 달라 구(舊) 한국은행이라 부른다.”

서울대 박훈 교수가 12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이태경기자

 

-철도에도 관심을 뒀다고 들었다.

“경인철도합자회사,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사장을 맡아 경인선과 경부선 건설에 나섰다.

경인선은 1900년, 경부선은 1905년 완공된다.”

 

◇근대 화폐 시스템의 역할

 

-일본의 근대 화폐 시스템은 어땠나.

“앞서 17세기 초 도쿠가와 막부가 출발했을 때 금화, 은화, 동화가 다 발행된다.

화폐 유통도 잘됐다.

막부는 지폐를 내지 않았지만, 지방의 많은 번에서 지폐를 발행했다.

메이지 정부가 돼서 처음엔 은행 지폐로 지방의 지폐를 흡수하다가 중앙은행 지폐로 모두 통합했다.”

 

-당시 조선의 화폐 시스템은.

“조선은 금화나 은화는 없었고 지폐도 내지 못했다.

상평통보가 있었지만, 널리 유통되지 못했다.

오히려 쌀과 목면이 화폐 역할을 했다.

화폐 유통이나 화폐 경험이란 측면에서만 보면 조선과 일본은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농업 생산력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화폐 부문의 격차가 컸다.”

일본 재무성이 2019년 4월 8일 공개한 새 지폐 도안 견본. 1만엔권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화가 담겼다. /일본 재무성

 

-근대 화폐와 은행 시스템은 일본 경제 발전에 어떤 도움을 줬나.

“‘대규모 공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은행을 세워서 경제에 혈액인 돈을 공급해야 한다.

’ 이런 생각에 일본 메이지 정부는 은행 등 금융 제도를 우선 만들었다.

시부사와도 일찌감치 제일국립은행이라는 은행을 창업했다.

막부 시대 봉건 영주인 다이묘들은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 모두 없앴는데, 그냥 다 쫓아낸 건 아니고 번 생산량인 고쿠다카(石高)의 10분의 1 정도는 보장해 줬다. 이들이 그 돈을 초창기 은행에 넣었다.

또 방직업, 철도 등에도 투자해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태동한 것이다.”

 

-대한제국 때 시부사와의 사업은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의 자원과 인력이 부족해 시부사와가 금융, 철도 인프라 구축에 손을 댔지만, 나중에 회수했다면 큰 문제가 안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이어졌다.

그에 앞서 시부사와가 화폐도 만들고 철도도 놨으니 소급해 보면 침략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부사와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은 그가 대한제국 경제를 개발시키려고 한 측면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누구

日선 기업 설립 힘쓴 ‘자본주의 아버지’… 한국선 ‘침략자’ 비판

시부사와는 한국에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선봉에 섰다는 비판을 받지만, 일본에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훈 교수는 시부사와가 일본에서 500여 기업의 설립에 관여했지만, 이윤 추구만 강조하기보다는 기업의 이윤 추구와 도덕적인 경영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본 게 일본에서 여전히 인정을 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봤다.

 

- 일본 자본주의는 언제 성립됐나.

“1886년 전후를 일본에선 기업 발흥기라고 한다.

기업들이 우후죽순 설립되고, 경기가 좋아지던 시기다.

그때를 보통 일본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로 본다.

메이지 유신이 1868년 일어났으니까 18년 정도 시간차가 있다.”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 건물. /위키피디아

 

- 시부사와는 당시 뭘 했나.

“우선 29세에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 즉 현재 재무성의 핵심 멤버가 돼서 경제 관료로 3년 반 정도 일하면서 도량형 개정, 조세 개정, 지폐 제도 도입, 철도 부설 등 근대 경제 건설에 핵심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그 후 민간에 나와 500여 기업을 설립하거나 설립에 관여했다.

대표적인 게 제일국립은행, 도쿄해상화재보험, 제국호텔, 기린맥주 등이다.

관료 출신으로 일본 재계의 중심 인물이 된 것이다.”

 

- 시부사와의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은.

“시부사와는 유럽이나 미국형 자본주의를 일본에 적용하려 했고 주식회사 제도도 앞장서서 도입했다.

그런데 서구식 이윤 추구만 강조한 게 아니라 이른바 도덕 경영이나 책임 경영을 굉장히 강조했다.

그 기반을 ‘논어’에서 찾았다.

시부사와의 강연록을 모은 ‘논어와 주판’이란 책을 보면, 기업의 이윤과 도덕은 양립할 수 있고 도리어 양립하지 않으면 기업 이윤은 영속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설립에 관여한 500여 회사 중 제일국립은행, 시부사와창고 등 2곳에서 지분이 높았고 나머진 적은 지분만 있었다.

미쓰비시, 미쓰이 등 재벌과 확연히 달랐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그에 대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언급한 인물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내셔널 뱅크 시스템

미국의 내셔널 뱅크(national bank) 시스템은 중앙은행이 없이 정부의 인가를 받은 내셔널 뱅크들이 각자 화폐를 발행하는 금융 체제를 가리킨다.

미국에서 ‘내셔널 뱅크법’이 만들어진 1863년부터 중앙은행이 세워진 1913년까지 운영됐다.

 

☞박훈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메이지유신과 동아시아의 정치문화 등을 연구해 왔고 한일관계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등이 있다.

 

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chosun.com)

 

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한반도 금융 장악했던 日 자본주의 아버지, 1만엔권 새 얼굴 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박훈 서울대 교수가 말하는 日자본주의 아버지 시부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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