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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 위에 건물주’ 시대 저물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4.08.21 00:24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길을 걷다 보면 ‘임대’ 현수막을 내건 상가가 부쩍 늘었다. 활기를 잃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신촌 등은 심각하다. 서너 곳 지나 한 곳 꼴로 비어 있다. ‘임대’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오래전에 임차 문의조차 끊긴 경우도 많다. 그런데 핵심 상권으로 꼽히는 강남역, 명동 등지에도 ‘임대’ 문구가 곳곳에 눈에 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전철역과 인접해 있고 유동인구도 많아 인기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가까지도 몇달씩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보통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가격을 낮추는 게 시장원리다. 그런데 상당수 상가 건물주는 임대가 되지 않더라도 임대료를 낮추기보다는 그냥 비워두는 방법을 택한다. 상가는 수익형 부동산이라 임대료는 매매가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매매가를 추산할 때는 입지, 상권, 주변 세대 수, 유동인구 등 고려해야 할 요인이 많지만 단순계산식으로는 연 임대료(월세×12개월)를 수익률로 나눈 금액에 보증금을 더하면 된다. 예를 들어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200만원, 수익률 5%일 경우 상가 가격은 5억원이다. 그런데 월세를 150만원으로 내리면 상가 가격은 3억8000만원으로 뚝 떨어진다. 상가 주인 입장에선 나중에 상가를 ‘제값’ 받고 팔려면 높은 임대료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지금 낮은 임대료를 받느니 몇 달을 기다리더라도 원하는 임대료를 제시하는 임차인을 찾는다. 그래도 임차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일정 기간 임대료를 받지 않는 ‘렌트 프리(Rent Free)’ 계약을 한다. 1년간 무상 임대하고 1년은 월 200만원을 받기로 계약하면 임차인에게 임대료는 월평균 100만원인 셈이다. 상가 주인은 월 임대료를 200만원으로 유지했기 때문에 가치는 그대로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공실로 인한 부담도 줄이고 상가 가치도 떨어뜨리지 않으니 ‘일석이조’다.
하지만 상가 주인은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요즘 빌딩 임대 수익률은 3% 남짓 정도다. 대출금리가 5%에 육박하고 있으니 많은 대출을 끼고 상가를 샀다면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예외가 있겠지만 부동산값이 크게 오르던 2~3년 전 강남 등에서 매입한 상가를 요즘 되팔 때 대부분이 이익을 남기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곳곳에서 상가는 쏟아진다. 1~2층짜리 건물을 허물고 신축하면 5~6층짜리 건물이 들어서고 상가는 두 세배 늘어난다. 아파트 단지를 재건축할 때도, 신도시를 건설할 때도 상가는 우후죽순 들어선다. 전국의 신도시와 혁신도시
등은 상가 공실로 신음하고 있다. 세종시의 상가 공실은 심각한 지역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저녁이 되면 불 켜진 아파트와 불 꺼진 상가가 대비되며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상가 수요는 오히려 줄고 있는데 상가 공급은 마구잡이식으로 늘어난 탓이다. 우선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2019년 5185만 명이던 한국 인구는 2020년 5183만 명으로 감소하더니 2023년에는 5177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온라인쇼핑, 배달, 유연한 근무제 확산 등으로 오프라인 매장과 사무실의 필요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상가 공급은 늘기만 한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에서 신규 공급된 상가는 10만 실을 넘어, 연평균 3만 실을 웃돌았다. 올해도 2만3000실가량이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요가 감소하는데도 공급이 늘어나는 건 구조적 문제 탓이 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택지지구를 개발한 다음 상업용지를 충분히 공급한다. 이때 쓰는 공급 방식이 경쟁입찰이다. 가장 높은 액수를 제시한 건설사에 용지를 판다. 비싼 값에 땅을 사들인 건설사 입장에선 충분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 고분양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주변 아파트가 인기니 상가 가격도 뛸 것으로 기대한 개인 투자자는 높은 분양가를 감수하고 상가를 분양받는다. 분양가가 높으니 상가 건물주는 당연히 임대료를 높여 받아야 한다. 일부 지역에선 분양가가 3.3㎡당 1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상당수 자영업자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다. 빈 상가가 넘쳐난다. 소위 서울 강남·서초지역 ‘대장 아파트’ 내 상가에서도 빈 곳이 속출한다.
상가 투자자는 상가를 비워두니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임차인 입장에선 경기도 좋지 않은 데다 임대료가 갈수록 치솟으니 아예 사업을 접는다. 이를 상가 투자자의 투자 잘못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은퇴 후 상가나 작은 빌딩을 사들여 월세를 받아가며 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꿈꾼다. 요즘 많은 은퇴자가 상가 투자 실패로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은퇴자의 노후가 불안하면 한국 경제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상가 과잉 공급 문제를 알면서도 방치하는 건 정부의 직무 유기다.
김창규 경제에디터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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