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준비+기회
깨어 이기는 자가 되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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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4: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1:2,6, 4:2)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우리를 모든 것보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최상의 드림을 누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차마 사람에게도 줄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드림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은 당시 이스라엘에 매우 팽배했고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현재는 믿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임)들에게 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들의 주인이셨으나(6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인으로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했으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마 15:8).
그도그럴것이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실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등 두 무리의 거짓되고 외식하는 사람들을 형성했는데 오죽했으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마 23:23)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1:2절에서 표현한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외모와 유익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타락한 유대인의 상황 일뿐 아니라 오늘날 특별히 시련을 당하고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가 자주 하는 말임을 생각할 때 너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동정하고 자신을 사랑하여 육신의 연민에 빠질 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득죄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타락의 시작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한 주인으로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음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환경만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오해한 까닭입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하는 사탄에 속한 세상이 어찌 우리를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사탄과 그에 속한 세상에서 당하는 상처나 아픔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일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지요.
그러니 이러한 환경은 우리가 욥처럼 눈을 뜨지 못하면 알 수 없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사탄이 욥을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가능한 것이지 않았습니까? 그 모든 것이 욥을 성장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드는 순간, 잠시라도 허점을 보이는 순간 우리는 그 즉시 이스라엘이나 바리새인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맙시다. 비록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리 저리고 찢기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욥이 모든 것을 회복하고 갑절로 복을 받았듯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4:2절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렇습니다. 온 땅은 사망과 불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과 정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치유하는 날개를 가지고 의의 해로써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비춰서 치유하시는 해 이십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많은 결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병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치유는 우리로 기쁨을 갖게하여 분노와 염려를 잊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이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고 또한 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셔서 이 마지막 때에 깨어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우리를 모든 것보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최상의 드림을 누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차마 사람에게도 줄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드림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은 당시 이스라엘에 매우 팽배했고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현재는 믿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임)들에게 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들의 주인이셨으나(6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인으로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했으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마 15:8).
그도그럴것이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실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등 두 무리의 거짓되고 외식하는 사람들을 형성했는데 오죽했으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마 23:23)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1:2절에서 표현한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외모와 유익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타락한 유대인의 상황 일뿐 아니라 오늘날 특별히 시련을 당하고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가 자주 하는 말임을 생각할 때 너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동정하고 자신을 사랑하여 육신의 연민에 빠질 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득죄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타락의 시작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한 주인으로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음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환경만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오해한 까닭입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하는 사탄에 속한 세상이 어찌 우리를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사탄과 그에 속한 세상에서 당하는 상처나 아픔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일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지요.
그러니 이러한 환경은 우리가 욥처럼 눈을 뜨지 못하면 알 수 없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사탄이 욥을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가능한 것이지 않았습니까? 그 모든 것이 욥을 성장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드는 순간, 잠시라도 허점을 보이는 순간 우리는 그 즉시 이스라엘이나 바리새인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맙시다. 비록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리 저리고 찢기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욥이 모든 것을 회복하고 갑절로 복을 받았듯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4:2절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렇습니다. 온 땅은 사망과 불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과 정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치유하는 날개를 가지고 의의 해로써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비춰서 치유하시는 해 이십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많은 결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병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치유는 우리로 기쁨을 갖게하여 분노와 염려를 잊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이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고 또한 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셔서 이 마지막 때에 깨어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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