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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시간 없음은 나쁜 삶의 징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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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시간 없음은 나쁜 삶의 징후다
입력2022.10.04 18:14 수정2022.10.05 00:13 지면A28
■ 시간의 속도와 삶의 속도
과거는 인출할 수 없는 은행 잔액
현재는 근심에 가득 찬 대출 통장
미래는 인출하지 않은 희망 자산
좋은 삶의 첫 조건은 덜 바쁜 것
이제는 시간의 속도를 멈추고
자신을 돌보는 데 우선 투자를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살아있는 동안 시간은 규칙적인 연쇄 속에서 반짝인다. 시간은 우리의 생을 빚는 프로세스로 가득 찬 바탕이다. 열여덟 살 때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가 있었다. 시간은 늘 향기롭고 반짝거렸다. 가능성으로 충만한 시간을 지나 어른이 되자 시간이 무한이라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시간은 유한자원이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사라지는 존재들. 죽음은 생의 약동과 의미의 생산을 멈추는 시간의 종결 형식, 현재라는 날개를 접고 자신을 과거에 가두는 방식이다.
아, 시간이 늘 반짝이던 시절
모든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시간은 저마다 다른 박동과 리듬을 타고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에 포박된 채로 흘러가는 우리들. 시간은 우리 몸으로 들어와 겹으로 쌓이고 그 겹은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없다. 저 알 수 없는 피안으로 미끄러져 가는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별하고 인지한다. 시간 감각은 또렷한 분별 속에서 인지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까닭이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 속에 미분화 상태의 덩어리로 잠겨 있다. 내가 태어난 시간은 과거다. 내 청춘의 날도 흘러가 버린 과거다.
노화가 진행되는 바로 지금이 현재다. 미래는 시간의 고갈 속에서 기억이 휘발하고 근육 소실과 더불어 임박한 죽음과 마주하는 때이다.
현재는 과거의 근미래다. 과거는 어떤 의미도 만들지 못한 채 멈춘 시간, 죽어서 응고된 시간이다. 과거를 쪼개고 분석해도 미래를 유추해낼 수는 없다. 추억은 과거 자산이다. 추억은 회상으로만 불러낼 수 있고, 영원한 회귀 불가능성 속에서 찬란하게 타오르는 빛이다. 과거 자산이란 인출해서 쓸 수 없는 은행 잔액에 견줄 수가 있다.
추억이 과거 자산이고 근심과 걱정은 현재에 마주하는 마이너스 자산이다. 희망은 인출하지 않은 미래 자산이다. 과거는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미래는 사물에 깃든 영혼이다. 과거 감각이 부피가 있고 물질적인 데 반해 미래 감각은 비물질이고 부피가 없다. 미래 시간은 정신과 의지 안에서만 작동한다.
현재는 언제나 덮치듯이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실천의 계기를 무화시키며 현재와 타협한다. 사실은 타협이 아니라 투항이다. 아니, 의지의 고갈 속에서 현재의 응석받이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어. 조금만 쉬자. 남은 일은 내일 하자. 이 말들은 현재를 향한 우리의 태만과 응석을 드러낸다.
자기를 위한 시간 없음, 즉 시간의 고갈에서 권태가 생겨난다. 현재는 우리 안의 고갈과 권태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권태의 본질은 무엇을 창조하는 게 불가능한 시간의 메마름이다. 사랑도 의지도 품지 않고 우리를 바깥으로 내뱉는 이것. 우리 안에 확장된 메마름의 집어삼킴에 투항하는 사태가 권태라면 이것에 내몰린 자는 자기 삶을 방기한다.
미래는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미래는 현재 안에 와 있지만 미처 발견되지 않은 시간이다. 그것은 인력이 미치는 장(場) 안에서 수시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제 영향력을 미치는데,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미래의 영향력을 수납한다. 현재가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더욱 미래에 기댄다. 미래의 희망을 품고 그걸 오늘을 견디는 힘으로 삼는 사람은 미래와의 밀회를 즐긴다고 할 수 있다.
왔다가 떠난 봄이나 덧없이 흘러간 인생을 노래하는 시들은 사실 시간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향기로운 시간, 청춘의 찬란함은 빠르게 지나간다. 오, 우리 감각을 활짝 열어주던 그 향기로운 시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간이 화석으로 변하고 거대한 퇴적층으로 변할 때 우리는 노스탤지어를 앓는다. 한 번 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예이츠의 ‘그대 늙었을 때’란 시는 백발이 성성한 늙음의 시간을 현재로, 기억을 과거로 되돌리며 잃어버린 감각과 기억을 깨운다.
늙고 잠이 많아질 때 벽난로 옆에서 휘발된 청춘의 찬란함을, 그 시절의 영광을 떠올리는 것은 만년의 특권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의 감각과 기억을 헤집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유쾌하고 우아한 시절을 사랑했고/또 그대의 거짓 혹은 진실을 사랑했던가를./그러나 한 사람만이 그대의 방황하는 영혼을 사랑했고,/변해가는 그대 얼굴의 슬픔까지 사랑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청춘이란 생의 여정 속에서 가장 향기로운 시간이고 젊음의 역동과 즐거움으로 넘치는 시절이었음을.
"정말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어"
한 사람 한 사람은 현재에서 발명되는 실재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와 그것을 품은 세계는 현재에서 벌어진 윤무에 참여한다. 현재는 잘게 쪼개져 흩어지는데, 그 시간이 의미로 응고되고 향기로운 기억이 되려면 머무름이 있어야 한다. 머무름은 바쁨의 예속을 끊어내고 의미의 지속과 영속화에 이어진 굳건한 기획에 자신을 밀착해야 한다. 하지만 가속화된 문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늘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늘 ‘바빠요. 정말로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바쁨은 휘몰아치는 사건의 연쇄에 얽매인 상태다. 어떤 이들은 바쁨을 생의 자랑스러운 징표로 삼는다. 시간 없음의 실체는 무의미하게 난비하며 사라진 시간에 대한 강박적 혼돈의 감각이다.
바쁨은 다가올 고갈과 불행의 불길한 징후다. 시간 없음이 존재의 가능성을 갉아먹고 생의 부피를 쪼그라트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쪼그라듦 속에서 피폐해진다. 우리는 시간 없음 속에서 삶의 가능성을 하나씩 유실하면서 결국 죽음이라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왜 시간이 없는가? 우리가 너무 많이 살려고 시간을 과소비하는 까닭이다. 전체의 온전함을 쪼개고 고요의 질서를 삼켜버리는 바쁨에 자기를 방기하는 것은 삶의 나쁜 징후다. 바쁨은 시간의 산만하고 파괴적 속도에 편승하는 것이다. 세계의 고요와 단순성에서 단절되는 것은 삶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신호다. 당장 시간의 속도를 멈춰라! 그리고 자기만의 시간에 머물도록 애써야 한다. 잘산다는 느낌과 보람은 한가로움을 취하고 시간의 의미화에 성공할 때 깃든다. 좋은 삶의 단 한 가지 조건은 덜 바빠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를 바쁨에서 해방시키고 자기를 돌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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